2014년 3월 15일 토요일

자격 없는 말

 나에겐 권위가 없기에, 나는 나의 말에 어떠한 권위도 부여해줄 수 없다. 권위를, 말이 될 자격을 가지지 못한 나의 말은, 곧바로 폐기처분 된다.

2014년 3월 12일 수요일

BWV 1065

 J.S.Bach BWV 1065
 Konzert a-moll fuer vier Cembali, zwei Violinen, Viola und Continuo 
 Gustav Leonhardt, das Leonhardt Consort/Telefunken
 http://www.youtube.com/watch?v=Bsuy6x6ExsQ

 1.잿빛으로 바란, 말라비틀어진, 기억들이 달려온다. 혼란스럽다. 미칠듯이 어지럽다.
 2.농축된 기억은 가슴을 쿵쾅쿵쾅 쳐댄다. 비탄함은 분노가 되고, 복수심으로 고조되어 간다.
 3.'이제부터는 순수한 분노의 시간입니다, 부디 평온하시길'

 +
 Trevor Pinnock, the English Concert/Archiv
 http://www.youtube.com/watch?v=QA1L0SsEXxU
 (>연주가 참 좋다. 그런데, 음색이 너무 반듯해서. 꼬이고 뒤틀어진 것에서 느껴지는, 그런 감동을 느끼지는 못하겠다. 뭔가 안철수 같다.(너무 심했나?)) 

 Karl Ristenpart, the Chamber Orchestra of the Saar/Nonesuch
 http://www.youtube.com/watch?v=Xr8sK0NNumc
 (>비루한 '삼류 막장 드라마'같은 레온하르트의 것과는 달리, 숭고한 '일급 비극'의 느낌이 난다.)

탈핵운동의 방향에 대한 (잡)생각

 1.다른 이를 고유한 개성을 가진 동등한 인격체로 인정하기 위해서는, 다른 이의 행복을 지켜주기 위해서는, 다른 이와 윤리적인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민중을 위한, 좌익적 운동의 바탕에는 이런 물음이 기본적으로 깔려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단 한명도 놓지지 않으려는, 그러한 시각을 가져야 하는 것 아닐까. 더 나아가서, 사람 이외의 존재에 대해서도 그러한 시각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때문에, 핵마피아에 맞서서 민중의 삶과 행복을 지키려는, 더 나아가 지구의 안녕을 지키려는, 탈핵을 외치는 이들 또한 그래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실망스러운 모습을 간혹 보인다. 후쿠시마가 절대적인 악이라도 되는 양, 사유의 영역 바깥으로 밀쳐내며, 동시에 그 위의 삶에 대한 애정어린 시선마저 거부하거나, 심지어는 그 위에서 어그러져버린 삶을 직접적으로 조롱하고 비하하거나 혐오하는 식으로 말이다(기형 해바라기에 대한 '역겹다'는 식의 반응이 대표적이다.).

 핵폭발 이후 등장한 엉켜버린 생태(체)계와 피폭당한 인간과 인간아닌 존재들, 그들은 우리의 이상과는 동떨어진 영역에서 새롭게 등장하였다, 그들과의 대면은 당연히 당황스러울 것이다. 그러나, 그들 역시 엄연히 우리와 같은 시대에 함께 있다. 때문에, 그들의 안녕을 빌어주고, 그들의 행복을 빌어주고, 그들과의 관계에 대하여 고민하고, 그들에게 애정어린 시선을 포기하지 않아야 한다. 그들만의 이상적인 단일성을 유지하고자, 이상적이지 않은 존재들을, 공동체 바깥으로 치워버리고 지위버렸던, 나치 독일의 악행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는 말이다.

 2.'끝'이라는 말에 신중해져야 한다. '끝'이라는 식의 말은, 그 자극성 때문에 대중의 일시적인 관심을 떠 끌 수 있을 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피폭된 존재들과 함께 그들에 대한 관심마저 '끝'내버릴 수 있다는 점에서, 무책임하고, 핵폭발 후의 상황에 대한 대중의 관심 또한 동시에 '끝'내버려, 그들이 현실적인 불안감을 가지지 못하게 할 수 있다는 점에서, 비효율적이다.

 피폭당한 존재들에 대한 책임을 다하기 위해서는, 대중들에게 막연하기 때문에 (엄청난 것 같기도 하면서 별 것 아닌 것 같지 느껴질 수도 있는) 불안감이 아닌 현실적인 불안감을 주기 위해서는, 피폭으로 인하여 파괴된 그들의 삶을 끊임없이 사유하며 밝혀내고, 피폭된 존재들에게 끊임없는 애정어린 시선을 보내고, 그 파괴된 삶을 어떻게 회복하고 그들과 어떤 관계를 맺어가야 할지 고민하며, 피폭당한(피폭 '후'의) 존재들을 집요하게 사유와 시선의 영역 안으로 끌고와야 한다.

2014년 3월 10일 월요일

바더 마인호프 콤플렉스

 1.
 손 쓰지 못한 채 빗나가 버려, 죄없는 민중들을 향하게 된, 맹목적으로 변한 테러는, 끝내 실패하였고
 국가 권력에 의해 억압받다, 자기모순에 빠지게 된, 그들 서로에 대한 인간애마저 잃어버린 좌익들은, 미쳐 병들어가다 끝내 죽어버린다.

 빗나가다 식어버린 혁명과 병들어 스러져간 불꽃같은 삶을 보며, 가슴이 아렸다.

 2.
 '잘나가는' 좌익 저널리스트가 좌익 테러리스트가 되는, 안정되고 명예로운 삶이 불안하고 무시받는 삶으로 변하는, 창으로 나뉘어진 두 삶의 경계. 그 앞에서 서성이는 울리케 마인호프의 모습을 보며, 나는 마음을 졸였고, 그 경계를 넘어버리는 울리케 마인호프의 모습을 보며, 나는 울컥했다.

 체제 바깥으로 한 발자국도 내 딛지 못하는 나의 모습이, 비겁하고 비참했다.

 3.
 적군파 단원들은 울리케 마인호프를 냉대하며 그녀를 정신병으로 내몰았다. 그녀가 죽은 다음에는, 그녀의 죽음을 정치적으로 이용하기에 바빴다.

 인간성과 인간애를 잃은 자들의 혁명이, 혁명일 수 있을까.

P.S.

*68혁명의 시위대는, 강연중인 아도르노에게 피를 흩뿌리고 젖가슴을 들이밀며, 그를 희롱하고 조롱한다.
 '강단 사회주의자', 프랑크푸르트 사회연구소의 창을 넘지 못한 아도르노는, 시름시름 앓다가 일찍이 죽어버린다.
 적군파의 단원들과 국가권력은 미쳐가는 마인호프 앞에서 냉대와 강압, 방임으로 일관한다.
 '좌익 테러리스트', 프랑크푸르트 사회연구소의 창을 뛰어넘은 마인호프는, 서서히 미쳐가다 끝내는 죽어버린다.

 자책감에 시달리거나, 냉대와 폭압에 시달리다, 시름시름 죽어가는 것이 좌익의 운명인 걸까.

상식에 갇힌 인간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403101614271&code=960801&nv=stand

1.자상한 아버지, 따뜻한 남편, 어디에서나 볼 법한 중년의 남성, 모범적인 독일인, 아돌프 아이히만.
그는 법정에서 이 말을 반복했다고 한다. 'Fuerer의 말이 곧 법이다.'
그는 상식적이지 않았기 때문에 악행을 한 것이 아니라,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고 상상을 거부하며 상식에 갇혔기에 악행을 저지른 것이다.

2.따뜻한 남편, 훈훈한 사위, 능력있고 인간적인 중년의 남성, 모범적인 한국인, 함익병.
그도 마찬가지이다.
수십세기 전의 그리스와 로마의 사상이, 수세기전의 영국의 사상이 그에게는 법이자 윤리이다.
그 또한 상식적이지 않았기 때문에 악행을 한 것이 아니라,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고 상상을 거부하며 상식(그 것도 수세기, 수십세기 전의 상식에)에 갇혔기에 망언을 내뱉은 것이다.

P.S.
-연대 출신의 인물 좋고 훈훈한 남자 의사, 인기 정치인의 자격요건을 모두 갖춘 듯 하다. 가까운 시일 내에 한 자리 차지할 듯 하다. 물론, 이번 사건을 잘 넘기는 것을 전제로 말이다. 함익병은 애가 닳겠다.

-그의 발언 중 '자본주의적 논리가 아니라'라는 부분에 눈길이 간다. 기술과 자본의 지배를 혐오했다는 카를 슈미트의 모습이 겹치면서 약간 서늘한 느낌이 든다.

-그럼, 나는 어떤가? 라는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나의 상상은 상식에 갇히지 않았을지 몰라도, 나의 행동은 상식에 갇혀있다.
머리와 행동이 따로 논다는 점에서는, 내가 저들보다 더 비겁하다.
언제쯤 용기를 낼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