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4월 11일 금요일

그녀는 우리의 로두스다

내가 감내할 수 있는 차이의 한계는 어디까지일까?
적어도 적의를 보이며 칼을 휘두르는 자는 받아들일 수 없겠지.
동물의 모습을 한 인간도 받아들이기는 힘들듯 하고.

그녀가 많이 무례한건 사실이다.
때문에, 그녀를 밀쳐내는 건, 상식적으로 극히 마땅한 행동이다.
하지만 그녀가 당장 위험한 존재는 아닌 것 또한 마찬가지이다.
들뢰즈를 고진을 읽고 차이를 말하는, 도서관의 선한 사람들, 그리고 나,
조금만 더 용기낼 수는, 그녀와 마주칠 수는 없는 걸까?

당신들의 운동

 모든 이의, 더 나아가서 모든 존재의, 평등과 행복을 궁극적인 목표로 하지 아니하는 운동이, 어떠한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바로 옆에 있는, 청소년 활동가의의 인정욕구에 마저, 무책임하게 눈을 감아버리는, 그런 운동이 연대의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반성해야한다.

 특히, 김종철의 실언에도 소극적으로 대응하고(상벌위원회를 열어야 할 문제였음에도.), '아이들' 구호의 온상인, 녹색당은 더욱이.

http://hr-oreum.net/article.php?id=2671

지혜


'가짜 지혜, 진짜 지혜-영화나 사람이나 똑같다. 삶과 시간에 대해 무척 많은 걸 아는 척 하는 영화는 보는 사람을 비관적으로 만든다. 삶과 시간에 대해 정말 뭔가를 아는 영화는, 그와 반대로 사람을 여유롭고 충만하게 만든다. 더불어 성숙시킨다. 이 영화가 그렇다.' (허지웅)

 메시아의 재림이건, 해탈이건, 노동계급 승리건, 마을공동체의 재건이건, '종북척결'이건, 무엇이건 간에, 일말의 희망이라도 찾아내는 것,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을 조금이라도 더 견딜만 하게 만드는 것, 그것이 지혜가 아닐까.

 언제나 그랬듯이, 나 또한 지혜로워지기를. 지혜로워지기에는, 너무도 혹독한 세월이지만.

2014년 4월 6일 일요일

김규항의 글

 어렵고 거대한 개념도 없고, 화려한 기교도 없다. 소소하고 투박한 그의 글에서는 진솔함이 묻어난다.  다른 시선에서 이질감을 느끼면서도, 내가 그의 글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이유다.

2014년 4월 4일 금요일

베를린 천사의 시 (Der Himmel ueber Berlin)

 '아이'는, 공동체의 언어로 충분하게 말할 수 없다.
 '아이'는, 그 자신의 권위 없음으로 말미암아,  일상적인 무시를 경험한다.
 '아이'는, 그 자신의 능력 부족으로 말미암아, 다른 이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아이가 아직 아이였을 때, 아이는 자기가 아이인지 몰랐'다는 문장은, '아이는 자기가 아이인지 안 때, 아이는 더 이상 아이가 아니다.'는 뜻 또한 지닌다.

 나는 한트케가 이런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겠나 추측해 본다.

 '말하고 싶은, 타인으로부터 인정받고 싶은, 다른 존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그런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세요. 이제는 말합시다. 인사도 받읍시다. 행인에게 커피값도 받아보고, 동정도 받아보고, 그리고 사랑도 해봅시다. 완전해지기 위해 불완전해집시다. 착하고 여린 관조자, 여러분, 천사들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