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6월 16일 월요일

올드보이 (박찬욱, 2003)

1.

 녹음기의 릴이 돌아간다. 테잎은, 오른편 릴로부터 완전히 벗아나고, 헤드를 지나, 모조리 외편 릴에 감기게 된다. '몬스터'는 어떻게 된 걸까. 사라져 버린걸까, 아니면, 무의식의 영역으로 걸어들어간 걸까.

 어찌되었건, 오대수가 끝까지 도덕적이었다는 것, 근친상간의 금기를 꺨 수 없었다는 것, 그 것만은 확실하다.

 '몬스터'와 '오대수', 무의식과 초자아, 오대수의 그 '웃음'은, 그 사이에서 고통받는, 모든 문명인의 표정이 아닐까.

2.

 누나의 자살과 사설감옥에서의 감금,  이우진의 고통과 오대수의 고통,둘다 (궁극적으로는) 타인에 의한 것이다.

 이후, 그들은 타인과 관계맺기를 꺼리고, 복수를 (시작)한다.

 그럼에도, 그들은 말한다, 외로웠다고, 외롭다고.

3.

 이우진의 펜트하우스와 오대수의 설산.
 투신을 통해 자살하는, 남자와 이우진의 누나.
 하강하는 승강기에서, 오르가슴을 느끼는 오대수와 잃어버린 사랑의 대상을 생각하며 권총자살하는 이우진.

 올드보이에서의 상(승)과 하(강)에, 문명과 원초적 욕망이라는 도식을 대입하는 건, 너무 지나친 일일까.

4.

 설국열차와 올드보이, 두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겹친다.
 어쩌면, 설산 정상의 오대수와 미도 (또는, 문명과 금기에 다시금 갇혀버리는 인간)는, 설산 아래 유나-티미의 미래 일지도.

2014년 6월 11일 수요일

'겨울바다' (김남조)

1.
 '기도를 끝낸 다음/ 더욱 뜨거운 기도의 문이 열리는/ 그런 영혼을 갖게 하소서.'
 '남은 날은/ 적지만'


 화자는, 삶의 허무를 받아들이고 인간의 한계 안에 머무르면서도, '기도를 끝낸 다음'에도 '더욱 뜨거운 기도의 문이 열리'기를, 모든이의 구원을 기도할 수 있기를 기도한다.

2.
 '겨울 바다에 가 보았지,/ 인고의 물이/ 수심 속에 기둥을 이루고 있었네'

 화자는 시간에 갇힌 존재이다. 그러한 자의 것임에도, 부단한 인고(기도)에 의하여, 허무의 불은, 마침내 인고의 기둥으로 변한다.

3.
 (당위로 가득 찬 전능한 혁명가가 아닌) 허무에 허덕이는 유한한 인간, (교조주의적 행위가 아닌) 따뜻한 기도, (전 인류의 완전한 구원이 아닌) 나 자신의 허무의 극복. 화자는 범인이고, 그의 목표는 위대하나 환상을 심어주지는 않는다. '겨울바다'는 , 인간적이고, 위대하고, 현실적이다. 하여, 진정으로 혁명적이기까지 하다.

P.S.
인고의 물기둥의 이미지가 전달하는 무게감도, 커다란 감동이었다.

나를 사로잡은 문장들

나를 사로잡은 문장들, 종종 머릿속에 떠오른다.

'나는 물거품 속으로 걸어들어간다'
(니희덕, '말들이 돌아오는 시간')

'낯선 이웃들이 자꾸 인사하는 어떤 문밖에 서서/ 우리의 침대를 태우고 있거나 그런 비슷한 종류의 모든 문밖에 계속 서 있을 것만 같은'
'~다면/ 그것의 인내는 언제까지인가.'
(김상혁, '싸움')

'맨 끝 회랑에 이르러'
'이 눈부신 착란의 찬란'
(김선우, '나의 무한한 혁명에게')

'그 진실마저 눈물져 얼어버리고'
'인고의 물이/ 수심 속에 기둥을 이루고 있었네.'
(김남조, '겨울바다')

'입술의 와해나 상실로 인한 불타는 움직임'
'사라져버린, 사라져가고 있는 수많은 꿈의 유령들을 잠시 동안 친근하게 바라보게 된다'
(배수아, '북쪽거실')

삶의 영역

 악행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지는 않는 것, 극도의 악행은 저지르지 않는 것, 마지막 자존심이자 최소한의 양심이다. 그 영역만은, 넘어서지도 않았고, 넘어서서도 안된다. 거기까지만이, 삶의 영역이다.

2014년 6월 4일 수요일

고모

 1. 어떻게 지냈냐, 예쁘다, 그러면 안된다. 그녀의 말 중에서 추상적이고 '잘난' 말은 없었다, 그녀는 강사였고, 교수였음에도 불구하고.

 2. 고모는 약간은 엄격한 이미지로 남아있다. 필요없이 참견하는 정도의 것도, 무심하게 방관하는 정도의 것도 아닌, 적당한 정도의 엄격함.

 3. 때문에, 고모가 좋고, 고모의 삶에 대한 걱정을 약간은 놓을 수 있다. 

식자들

 풀어내지 아니한, 완고하게 굳어버린, 회색빛 언어들, 아무렇게나 던져댄다. 얻어맞은 범인들은, 자신의 무지를 탓하며, 자괴감에 빠질 뿐.

빈 사람이 할 수 있는, 최선의 행위

 줄 것이 없으므로, 소모적인 무책임으로 끝나버릴 관계, 나는 단념한다. 소극적으로나마, 사람을 아끼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하게 가능하고, 유일하게 가치있는 행위이기에

'모두'가 평등한 곳

 (더)어린 자들에게는 하대가, 글 읽지 못하는 자에게는 박대가, '모두'가 평등한 곳, '모두'가 모두일 수 없는 곳, 명랑한 구호, 명랑한 '모두', 눈감은 명랑함 앞에서, 깊은 역겨움을 느낀다.

2014년 6월 2일 월요일

'그래야 내가 편할 수 있다.'

 아무개의 블로그에는 이런 글귀가 있었다. '그래야 내가 변할 수 있다.'

 나라면 이렇게 썼을거다. '그래야 내가 편할 수 있다.'

 주의적인 삶이 부러울 때도 있지만, 이전만큼은 아니다. '니나'의 철인이 되고자 하는 강박증적 삶은 더더욱 싫다. 나의 손이 닿는 한에서, 내가 행복할 수 있는 한에서, 그저 그만큼만 노력하며 살아가련다.

'현실과 이상의 경계에서 고민(만)하는, 의식있는 좌익 중산층 인테리'의 이미지

 부, 명예, 학벌, 학식, 독일제 세단, 자가주택, 외모, 사상적 급진성, 심지어는 실생활의 보수성까지, 참으로 덧없고 별것 아닌,  '좌익 중산층 인테리'의 표식들을, 나는 은근한 자랑거리로 여겨왔다.

 그래서, 부, 모, 동생, 나의 것부터 시작하여, 외조부모, 친조부모, 심지어는 삼촌, 외삼촌, 고모의것 까지, '좌익 중산층 인테리'의 표식이 될만한 것들은 몽땅 끌고와, 나의 자아 아래에 받쳐놓아왔다.

 혹자는, 이러한 이율배반적인 삶으로부터는 벗어나야 한다고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좌익 중산층 인테리'의 틀에서 벗어나고 싶은 생각이 그다지 없다. '현실과 이상의 경계에서 고민(만)하는, 의식있는 좌익 중산층 인테리'의 이미지마저, 이제는 자아의 일부로 자랑스레 받아들이게 된, 그러한 나로서는 더더욱. 그저 편하게 살고 싶다.

치졸한 이중성

 그토록 폭력적이었던 부산을, 나는 자랑스레 말한다. 영남의 중심, 최대 규모의 광역시, 휴양지, 남성적인 도시, 부산의 이미지들을 가져다, 슬며시 나에게 붙인다. 내 고향이 호남이었다면, 내가 내 고향을 자랑스레 말할 수는 없었을테다.

 영남 중심의, 남성적인, 폭력적인, 억압적인 구조에 은근슬쩍 발 걸치는 것이, 지금의 내 모습이다.

2014년 5월 20일 화요일

끝없는 서러움

 1.널린 논밭을 보면서 자급자족의 생활을 구체적으로 계획했던 아버지는, 이제는 어쩔 수 없는 고학력 고소득 전문직 중산층이 되었다.

 2.녹색평론을 보면서 자급자족의 생활을 구체적으로 계획했던 나는, 이제는 고학력 고소득 전문직 중산층의 삶을 꿈꾸며, 변리사 시험 준비를 하고 있다.

 3.그 구체적 양태가 다를지 몰라도, 다음세대의 대부분도, 비루하고 비참하고 지루한 점에서는 비슷한, 그러한 삶을 살게 될 듯 하다. 그 정도는 다를지 몰라도. 서럽다.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사사키 아타루, 자음과 모음, 2012) 1장

 글쓴이의 무의식과 자신의 무의식을 맞대어 보는 일, 자신의 무의식을 드러내보는 일. 글읽기와 글쓰기에 대한 사사키 아타루의 정의다. 이것이 '신도 선망하게 하'는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무의식을 해방하는 일이라는 점에서는, 신의 구원을 바라지도 않게 하는 일이라고 볼 수는 있겠다. 아직 1장이고, 나의 이해는 여기까지이다. 이외의 내용은 그다지 인상적이지는 않았다. 글쓴이의 필력은 대단한 듯 하다.

2014년 5월 18일 일요일

한국식 인간관계















<Zwei Männer, einander in höherer Stellung vermutend, begegnen sich-Paul Klee-1903>

 존과 비의 스펙트럼, 상대를 그 위에 세우지 않고서는, 상대의 존과 비의 정도를 확실하게 하지 아니하고서는, 한국인은 안심할 수가 없나 보다. 끊임없이 나이를 묻고, 나이를 추측한다. 상대를 얼마나 존대-하대 하여야 하는지, 상대의 의견을 얼마나 존중-무시하여야하는지를, 나이의 기준을 통하여, 명확하게 정해야 한다. 존과 비의 기준 없이는, 나이를 모르고서는, 한국인은 인간 관계를 맺을 수가 없다. 그저 우스울 따름이다.

삶의 바탕

 '궁극적인 전제. 그렇다. 타우베스가 바울-마르치온-벤야민의 계보 아래 스스로를 위치시키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궁구했던 물음은 바로 '궁극적인 전제'에 관한 것이었다. 인간에게 궁극적인 전제란 무엇인가? 그것은 세계 자체, 삶 자체이다. 타우베스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앞서 왜 살아야 하는가라는 물음이 전제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의 관점에서는 이 물음이 언제나 망각 속에 처해 있기 때문에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실제적인 물음 역시 종국에 가서는 어김없이 막중한 혼란과 어정쩡한 타협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저 궁극적인 전제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은 반드시 '계시(Offenbarung)'에 대한 성찰에 다다르게 된다.' (바울의 정치신학/그린비/야콥 타우베스/조효원/p.308-309)

 구원이건, 해탈이건, 노동계급의 승리이건, 애인의 행복이건, 종북척결이건, 그 목적이 무엇인가는 중요하지 않다. 하나의 목적을 향하여 모든 열정을 바칠 수 있는 삶, 그러한 삶을 살 수 있다면, 그 목적의 달성과는 무관하게, 가슴 벅찬 행복을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2014년 5월 17일 토요일

'어쩔 수 없다'

 선생이나 부모와 싸울 줄도 알았고, 일진과는 기싸움도 팽팽하게 펼쳤다. 일종의 학생운동도 해보았고, 실패로 돌아갔지만, 대학 거부도 해보았다. 인생이 지독히도 엿같을 때, 약을 한움큼 먹어보기도 했다. 용기 있었고, 신념 앞에서 꽤나 꼿꼿했다.

 이제는 전혀 그렇지 않다. '어쩔 수 없다'고 말하는 것, 그외에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외할아버지

 1.

 외할머니의 2층 양옥의 현관으로 들어선다. 외할아버지가 품을 활짝 벌리고 있다. 따뜻하고 나그러운 인상이다. 나를 나무라는 엄마에게 약간 쫓기면서, 그의 품으로 달려간다.

 그에 대해 전해들은 정보는 많다. 그는 명망있는 인물이었고, 부유하고 명예로운 삶을 살았고, 대학을 두개 나왔고, 유능한 한의사였고, 아들의 죽음으로 말년을 슬프게 보냈다고 한다. 다혈질이었고, 머리가 뛰어났고, 특이했고, 고집이 강하였다는 점에서는 나와 닮았고, 화통하였다는 점에서는 나와는 달랐다고 한다.

 하지만, 나에게 가치있는 기억으로는, 나와 직접적인 관계를 가진 기억으로는, 가슴을 메여오게 하는 기억으로는, 저것이 유일하다.

 2.

 외로울 때면 경희대 캠퍼스를 걷는다. 다시금 저 기억이 떠오른다. 서글퍼진다.

 부모와 싸우고, 일진과 싸우고, 성적과 싸웠다. 자존심 외에는 나를 지탱해줄 것이 없었다. 나의 유년은 그랬다. 나를 감싸주려는 사람은 없었고, 나를 감싸줄 수 있는 사람도 없었다. 나는 외로웠고, 때문에, 지금도 외롭다.

 내게 외할아버지가 있(었)다면, 아니면 외할아버지 같은 사람이 있(었)다면, 결핍이 채워질 수 있(었)을까? 나의 삶은 바뀔 수 있(었)을까? 거의 기억도 나지 않는 그이지만, 너무도 그립다.

2014년 4월 11일 금요일

그녀는 우리의 로두스다

내가 감내할 수 있는 차이의 한계는 어디까지일까?
적어도 적의를 보이며 칼을 휘두르는 자는 받아들일 수 없겠지.
동물의 모습을 한 인간도 받아들이기는 힘들듯 하고.

그녀가 많이 무례한건 사실이다.
때문에, 그녀를 밀쳐내는 건, 상식적으로 극히 마땅한 행동이다.
하지만 그녀가 당장 위험한 존재는 아닌 것 또한 마찬가지이다.
들뢰즈를 고진을 읽고 차이를 말하는, 도서관의 선한 사람들, 그리고 나,
조금만 더 용기낼 수는, 그녀와 마주칠 수는 없는 걸까?

당신들의 운동

 모든 이의, 더 나아가서 모든 존재의, 평등과 행복을 궁극적인 목표로 하지 아니하는 운동이, 어떠한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바로 옆에 있는, 청소년 활동가의의 인정욕구에 마저, 무책임하게 눈을 감아버리는, 그런 운동이 연대의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반성해야한다.

 특히, 김종철의 실언에도 소극적으로 대응하고(상벌위원회를 열어야 할 문제였음에도.), '아이들' 구호의 온상인, 녹색당은 더욱이.

http://hr-oreum.net/article.php?id=2671

지혜


'가짜 지혜, 진짜 지혜-영화나 사람이나 똑같다. 삶과 시간에 대해 무척 많은 걸 아는 척 하는 영화는 보는 사람을 비관적으로 만든다. 삶과 시간에 대해 정말 뭔가를 아는 영화는, 그와 반대로 사람을 여유롭고 충만하게 만든다. 더불어 성숙시킨다. 이 영화가 그렇다.' (허지웅)

 메시아의 재림이건, 해탈이건, 노동계급 승리건, 마을공동체의 재건이건, '종북척결'이건, 무엇이건 간에, 일말의 희망이라도 찾아내는 것,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을 조금이라도 더 견딜만 하게 만드는 것, 그것이 지혜가 아닐까.

 언제나 그랬듯이, 나 또한 지혜로워지기를. 지혜로워지기에는, 너무도 혹독한 세월이지만.

2014년 4월 6일 일요일

김규항의 글

 어렵고 거대한 개념도 없고, 화려한 기교도 없다. 소소하고 투박한 그의 글에서는 진솔함이 묻어난다.  다른 시선에서 이질감을 느끼면서도, 내가 그의 글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이유다.

2014년 4월 4일 금요일

베를린 천사의 시 (Der Himmel ueber Berlin)

 '아이'는, 공동체의 언어로 충분하게 말할 수 없다.
 '아이'는, 그 자신의 권위 없음으로 말미암아,  일상적인 무시를 경험한다.
 '아이'는, 그 자신의 능력 부족으로 말미암아, 다른 이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아이가 아직 아이였을 때, 아이는 자기가 아이인지 몰랐'다는 문장은, '아이는 자기가 아이인지 안 때, 아이는 더 이상 아이가 아니다.'는 뜻 또한 지닌다.

 나는 한트케가 이런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겠나 추측해 본다.

 '말하고 싶은, 타인으로부터 인정받고 싶은, 다른 존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그런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세요. 이제는 말합시다. 인사도 받읍시다. 행인에게 커피값도 받아보고, 동정도 받아보고, 그리고 사랑도 해봅시다. 완전해지기 위해 불완전해집시다. 착하고 여린 관조자, 여러분, 천사들이여."

2014년 3월 15일 토요일

자격 없는 말

 나에겐 권위가 없기에, 나는 나의 말에 어떠한 권위도 부여해줄 수 없다. 권위를, 말이 될 자격을 가지지 못한 나의 말은, 곧바로 폐기처분 된다.

2014년 3월 12일 수요일

BWV 1065

 J.S.Bach BWV 1065
 Konzert a-moll fuer vier Cembali, zwei Violinen, Viola und Continuo 
 Gustav Leonhardt, das Leonhardt Consort/Telefunken
 http://www.youtube.com/watch?v=Bsuy6x6ExsQ

 1.잿빛으로 바란, 말라비틀어진, 기억들이 달려온다. 혼란스럽다. 미칠듯이 어지럽다.
 2.농축된 기억은 가슴을 쿵쾅쿵쾅 쳐댄다. 비탄함은 분노가 되고, 복수심으로 고조되어 간다.
 3.'이제부터는 순수한 분노의 시간입니다, 부디 평온하시길'

 +
 Trevor Pinnock, the English Concert/Archiv
 http://www.youtube.com/watch?v=QA1L0SsEXxU
 (>연주가 참 좋다. 그런데, 음색이 너무 반듯해서. 꼬이고 뒤틀어진 것에서 느껴지는, 그런 감동을 느끼지는 못하겠다. 뭔가 안철수 같다.(너무 심했나?)) 

 Karl Ristenpart, the Chamber Orchestra of the Saar/Nonesuch
 http://www.youtube.com/watch?v=Xr8sK0NNumc
 (>비루한 '삼류 막장 드라마'같은 레온하르트의 것과는 달리, 숭고한 '일급 비극'의 느낌이 난다.)

탈핵운동의 방향에 대한 (잡)생각

 1.다른 이를 고유한 개성을 가진 동등한 인격체로 인정하기 위해서는, 다른 이의 행복을 지켜주기 위해서는, 다른 이와 윤리적인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민중을 위한, 좌익적 운동의 바탕에는 이런 물음이 기본적으로 깔려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단 한명도 놓지지 않으려는, 그러한 시각을 가져야 하는 것 아닐까. 더 나아가서, 사람 이외의 존재에 대해서도 그러한 시각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때문에, 핵마피아에 맞서서 민중의 삶과 행복을 지키려는, 더 나아가 지구의 안녕을 지키려는, 탈핵을 외치는 이들 또한 그래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실망스러운 모습을 간혹 보인다. 후쿠시마가 절대적인 악이라도 되는 양, 사유의 영역 바깥으로 밀쳐내며, 동시에 그 위의 삶에 대한 애정어린 시선마저 거부하거나, 심지어는 그 위에서 어그러져버린 삶을 직접적으로 조롱하고 비하하거나 혐오하는 식으로 말이다(기형 해바라기에 대한 '역겹다'는 식의 반응이 대표적이다.).

 핵폭발 이후 등장한 엉켜버린 생태(체)계와 피폭당한 인간과 인간아닌 존재들, 그들은 우리의 이상과는 동떨어진 영역에서 새롭게 등장하였다, 그들과의 대면은 당연히 당황스러울 것이다. 그러나, 그들 역시 엄연히 우리와 같은 시대에 함께 있다. 때문에, 그들의 안녕을 빌어주고, 그들의 행복을 빌어주고, 그들과의 관계에 대하여 고민하고, 그들에게 애정어린 시선을 포기하지 않아야 한다. 그들만의 이상적인 단일성을 유지하고자, 이상적이지 않은 존재들을, 공동체 바깥으로 치워버리고 지위버렸던, 나치 독일의 악행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는 말이다.

 2.'끝'이라는 말에 신중해져야 한다. '끝'이라는 식의 말은, 그 자극성 때문에 대중의 일시적인 관심을 떠 끌 수 있을 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피폭된 존재들과 함께 그들에 대한 관심마저 '끝'내버릴 수 있다는 점에서, 무책임하고, 핵폭발 후의 상황에 대한 대중의 관심 또한 동시에 '끝'내버려, 그들이 현실적인 불안감을 가지지 못하게 할 수 있다는 점에서, 비효율적이다.

 피폭당한 존재들에 대한 책임을 다하기 위해서는, 대중들에게 막연하기 때문에 (엄청난 것 같기도 하면서 별 것 아닌 것 같지 느껴질 수도 있는) 불안감이 아닌 현실적인 불안감을 주기 위해서는, 피폭으로 인하여 파괴된 그들의 삶을 끊임없이 사유하며 밝혀내고, 피폭된 존재들에게 끊임없는 애정어린 시선을 보내고, 그 파괴된 삶을 어떻게 회복하고 그들과 어떤 관계를 맺어가야 할지 고민하며, 피폭당한(피폭 '후'의) 존재들을 집요하게 사유와 시선의 영역 안으로 끌고와야 한다.

2014년 3월 10일 월요일

바더 마인호프 콤플렉스

 1.
 손 쓰지 못한 채 빗나가 버려, 죄없는 민중들을 향하게 된, 맹목적으로 변한 테러는, 끝내 실패하였고
 국가 권력에 의해 억압받다, 자기모순에 빠지게 된, 그들 서로에 대한 인간애마저 잃어버린 좌익들은, 미쳐 병들어가다 끝내 죽어버린다.

 빗나가다 식어버린 혁명과 병들어 스러져간 불꽃같은 삶을 보며, 가슴이 아렸다.

 2.
 '잘나가는' 좌익 저널리스트가 좌익 테러리스트가 되는, 안정되고 명예로운 삶이 불안하고 무시받는 삶으로 변하는, 창으로 나뉘어진 두 삶의 경계. 그 앞에서 서성이는 울리케 마인호프의 모습을 보며, 나는 마음을 졸였고, 그 경계를 넘어버리는 울리케 마인호프의 모습을 보며, 나는 울컥했다.

 체제 바깥으로 한 발자국도 내 딛지 못하는 나의 모습이, 비겁하고 비참했다.

 3.
 적군파 단원들은 울리케 마인호프를 냉대하며 그녀를 정신병으로 내몰았다. 그녀가 죽은 다음에는, 그녀의 죽음을 정치적으로 이용하기에 바빴다.

 인간성과 인간애를 잃은 자들의 혁명이, 혁명일 수 있을까.

P.S.

*68혁명의 시위대는, 강연중인 아도르노에게 피를 흩뿌리고 젖가슴을 들이밀며, 그를 희롱하고 조롱한다.
 '강단 사회주의자', 프랑크푸르트 사회연구소의 창을 넘지 못한 아도르노는, 시름시름 앓다가 일찍이 죽어버린다.
 적군파의 단원들과 국가권력은 미쳐가는 마인호프 앞에서 냉대와 강압, 방임으로 일관한다.
 '좌익 테러리스트', 프랑크푸르트 사회연구소의 창을 뛰어넘은 마인호프는, 서서히 미쳐가다 끝내는 죽어버린다.

 자책감에 시달리거나, 냉대와 폭압에 시달리다, 시름시름 죽어가는 것이 좌익의 운명인 걸까.

상식에 갇힌 인간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403101614271&code=960801&nv=stand

1.자상한 아버지, 따뜻한 남편, 어디에서나 볼 법한 중년의 남성, 모범적인 독일인, 아돌프 아이히만.
그는 법정에서 이 말을 반복했다고 한다. 'Fuerer의 말이 곧 법이다.'
그는 상식적이지 않았기 때문에 악행을 한 것이 아니라,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고 상상을 거부하며 상식에 갇혔기에 악행을 저지른 것이다.

2.따뜻한 남편, 훈훈한 사위, 능력있고 인간적인 중년의 남성, 모범적인 한국인, 함익병.
그도 마찬가지이다.
수십세기 전의 그리스와 로마의 사상이, 수세기전의 영국의 사상이 그에게는 법이자 윤리이다.
그 또한 상식적이지 않았기 때문에 악행을 한 것이 아니라,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고 상상을 거부하며 상식(그 것도 수세기, 수십세기 전의 상식에)에 갇혔기에 망언을 내뱉은 것이다.

P.S.
-연대 출신의 인물 좋고 훈훈한 남자 의사, 인기 정치인의 자격요건을 모두 갖춘 듯 하다. 가까운 시일 내에 한 자리 차지할 듯 하다. 물론, 이번 사건을 잘 넘기는 것을 전제로 말이다. 함익병은 애가 닳겠다.

-그의 발언 중 '자본주의적 논리가 아니라'라는 부분에 눈길이 간다. 기술과 자본의 지배를 혐오했다는 카를 슈미트의 모습이 겹치면서 약간 서늘한 느낌이 든다.

-그럼, 나는 어떤가? 라는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나의 상상은 상식에 갇히지 않았을지 몰라도, 나의 행동은 상식에 갇혀있다.
머리와 행동이 따로 논다는 점에서는, 내가 저들보다 더 비겁하다.
언제쯤 용기를 낼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