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6월 16일 월요일

올드보이 (박찬욱, 2003)

1.

 녹음기의 릴이 돌아간다. 테잎은, 오른편 릴로부터 완전히 벗아나고, 헤드를 지나, 모조리 외편 릴에 감기게 된다. '몬스터'는 어떻게 된 걸까. 사라져 버린걸까, 아니면, 무의식의 영역으로 걸어들어간 걸까.

 어찌되었건, 오대수가 끝까지 도덕적이었다는 것, 근친상간의 금기를 꺨 수 없었다는 것, 그 것만은 확실하다.

 '몬스터'와 '오대수', 무의식과 초자아, 오대수의 그 '웃음'은, 그 사이에서 고통받는, 모든 문명인의 표정이 아닐까.

2.

 누나의 자살과 사설감옥에서의 감금,  이우진의 고통과 오대수의 고통,둘다 (궁극적으로는) 타인에 의한 것이다.

 이후, 그들은 타인과 관계맺기를 꺼리고, 복수를 (시작)한다.

 그럼에도, 그들은 말한다, 외로웠다고, 외롭다고.

3.

 이우진의 펜트하우스와 오대수의 설산.
 투신을 통해 자살하는, 남자와 이우진의 누나.
 하강하는 승강기에서, 오르가슴을 느끼는 오대수와 잃어버린 사랑의 대상을 생각하며 권총자살하는 이우진.

 올드보이에서의 상(승)과 하(강)에, 문명과 원초적 욕망이라는 도식을 대입하는 건, 너무 지나친 일일까.

4.

 설국열차와 올드보이, 두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겹친다.
 어쩌면, 설산 정상의 오대수와 미도 (또는, 문명과 금기에 다시금 갇혀버리는 인간)는, 설산 아래 유나-티미의 미래 일지도.

2014년 6월 11일 수요일

'겨울바다' (김남조)

1.
 '기도를 끝낸 다음/ 더욱 뜨거운 기도의 문이 열리는/ 그런 영혼을 갖게 하소서.'
 '남은 날은/ 적지만'


 화자는, 삶의 허무를 받아들이고 인간의 한계 안에 머무르면서도, '기도를 끝낸 다음'에도 '더욱 뜨거운 기도의 문이 열리'기를, 모든이의 구원을 기도할 수 있기를 기도한다.

2.
 '겨울 바다에 가 보았지,/ 인고의 물이/ 수심 속에 기둥을 이루고 있었네'

 화자는 시간에 갇힌 존재이다. 그러한 자의 것임에도, 부단한 인고(기도)에 의하여, 허무의 불은, 마침내 인고의 기둥으로 변한다.

3.
 (당위로 가득 찬 전능한 혁명가가 아닌) 허무에 허덕이는 유한한 인간, (교조주의적 행위가 아닌) 따뜻한 기도, (전 인류의 완전한 구원이 아닌) 나 자신의 허무의 극복. 화자는 범인이고, 그의 목표는 위대하나 환상을 심어주지는 않는다. '겨울바다'는 , 인간적이고, 위대하고, 현실적이다. 하여, 진정으로 혁명적이기까지 하다.

P.S.
인고의 물기둥의 이미지가 전달하는 무게감도, 커다란 감동이었다.

나를 사로잡은 문장들

나를 사로잡은 문장들, 종종 머릿속에 떠오른다.

'나는 물거품 속으로 걸어들어간다'
(니희덕, '말들이 돌아오는 시간')

'낯선 이웃들이 자꾸 인사하는 어떤 문밖에 서서/ 우리의 침대를 태우고 있거나 그런 비슷한 종류의 모든 문밖에 계속 서 있을 것만 같은'
'~다면/ 그것의 인내는 언제까지인가.'
(김상혁, '싸움')

'맨 끝 회랑에 이르러'
'이 눈부신 착란의 찬란'
(김선우, '나의 무한한 혁명에게')

'그 진실마저 눈물져 얼어버리고'
'인고의 물이/ 수심 속에 기둥을 이루고 있었네.'
(김남조, '겨울바다')

'입술의 와해나 상실로 인한 불타는 움직임'
'사라져버린, 사라져가고 있는 수많은 꿈의 유령들을 잠시 동안 친근하게 바라보게 된다'
(배수아, '북쪽거실')

삶의 영역

 악행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지는 않는 것, 극도의 악행은 저지르지 않는 것, 마지막 자존심이자 최소한의 양심이다. 그 영역만은, 넘어서지도 않았고, 넘어서서도 안된다. 거기까지만이, 삶의 영역이다.

2014년 6월 4일 수요일

고모

 1. 어떻게 지냈냐, 예쁘다, 그러면 안된다. 그녀의 말 중에서 추상적이고 '잘난' 말은 없었다, 그녀는 강사였고, 교수였음에도 불구하고.

 2. 고모는 약간은 엄격한 이미지로 남아있다. 필요없이 참견하는 정도의 것도, 무심하게 방관하는 정도의 것도 아닌, 적당한 정도의 엄격함.

 3. 때문에, 고모가 좋고, 고모의 삶에 대한 걱정을 약간은 놓을 수 있다. 

식자들

 풀어내지 아니한, 완고하게 굳어버린, 회색빛 언어들, 아무렇게나 던져댄다. 얻어맞은 범인들은, 자신의 무지를 탓하며, 자괴감에 빠질 뿐.

빈 사람이 할 수 있는, 최선의 행위

 줄 것이 없으므로, 소모적인 무책임으로 끝나버릴 관계, 나는 단념한다. 소극적으로나마, 사람을 아끼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하게 가능하고, 유일하게 가치있는 행위이기에

'모두'가 평등한 곳

 (더)어린 자들에게는 하대가, 글 읽지 못하는 자에게는 박대가, '모두'가 평등한 곳, '모두'가 모두일 수 없는 곳, 명랑한 구호, 명랑한 '모두', 눈감은 명랑함 앞에서, 깊은 역겨움을 느낀다.

2014년 6월 2일 월요일

'그래야 내가 편할 수 있다.'

 아무개의 블로그에는 이런 글귀가 있었다. '그래야 내가 변할 수 있다.'

 나라면 이렇게 썼을거다. '그래야 내가 편할 수 있다.'

 주의적인 삶이 부러울 때도 있지만, 이전만큼은 아니다. '니나'의 철인이 되고자 하는 강박증적 삶은 더더욱 싫다. 나의 손이 닿는 한에서, 내가 행복할 수 있는 한에서, 그저 그만큼만 노력하며 살아가련다.

'현실과 이상의 경계에서 고민(만)하는, 의식있는 좌익 중산층 인테리'의 이미지

 부, 명예, 학벌, 학식, 독일제 세단, 자가주택, 외모, 사상적 급진성, 심지어는 실생활의 보수성까지, 참으로 덧없고 별것 아닌,  '좌익 중산층 인테리'의 표식들을, 나는 은근한 자랑거리로 여겨왔다.

 그래서, 부, 모, 동생, 나의 것부터 시작하여, 외조부모, 친조부모, 심지어는 삼촌, 외삼촌, 고모의것 까지, '좌익 중산층 인테리'의 표식이 될만한 것들은 몽땅 끌고와, 나의 자아 아래에 받쳐놓아왔다.

 혹자는, 이러한 이율배반적인 삶으로부터는 벗어나야 한다고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좌익 중산층 인테리'의 틀에서 벗어나고 싶은 생각이 그다지 없다. '현실과 이상의 경계에서 고민(만)하는, 의식있는 좌익 중산층 인테리'의 이미지마저, 이제는 자아의 일부로 자랑스레 받아들이게 된, 그러한 나로서는 더더욱. 그저 편하게 살고 싶다.

치졸한 이중성

 그토록 폭력적이었던 부산을, 나는 자랑스레 말한다. 영남의 중심, 최대 규모의 광역시, 휴양지, 남성적인 도시, 부산의 이미지들을 가져다, 슬며시 나에게 붙인다. 내 고향이 호남이었다면, 내가 내 고향을 자랑스레 말할 수는 없었을테다.

 영남 중심의, 남성적인, 폭력적인, 억압적인 구조에 은근슬쩍 발 걸치는 것이, 지금의 내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