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5월 20일 화요일

끝없는 서러움

 1.널린 논밭을 보면서 자급자족의 생활을 구체적으로 계획했던 아버지는, 이제는 어쩔 수 없는 고학력 고소득 전문직 중산층이 되었다.

 2.녹색평론을 보면서 자급자족의 생활을 구체적으로 계획했던 나는, 이제는 고학력 고소득 전문직 중산층의 삶을 꿈꾸며, 변리사 시험 준비를 하고 있다.

 3.그 구체적 양태가 다를지 몰라도, 다음세대의 대부분도, 비루하고 비참하고 지루한 점에서는 비슷한, 그러한 삶을 살게 될 듯 하다. 그 정도는 다를지 몰라도. 서럽다.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사사키 아타루, 자음과 모음, 2012) 1장

 글쓴이의 무의식과 자신의 무의식을 맞대어 보는 일, 자신의 무의식을 드러내보는 일. 글읽기와 글쓰기에 대한 사사키 아타루의 정의다. 이것이 '신도 선망하게 하'는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무의식을 해방하는 일이라는 점에서는, 신의 구원을 바라지도 않게 하는 일이라고 볼 수는 있겠다. 아직 1장이고, 나의 이해는 여기까지이다. 이외의 내용은 그다지 인상적이지는 않았다. 글쓴이의 필력은 대단한 듯 하다.

2014년 5월 18일 일요일

한국식 인간관계















<Zwei Männer, einander in höherer Stellung vermutend, begegnen sich-Paul Klee-1903>

 존과 비의 스펙트럼, 상대를 그 위에 세우지 않고서는, 상대의 존과 비의 정도를 확실하게 하지 아니하고서는, 한국인은 안심할 수가 없나 보다. 끊임없이 나이를 묻고, 나이를 추측한다. 상대를 얼마나 존대-하대 하여야 하는지, 상대의 의견을 얼마나 존중-무시하여야하는지를, 나이의 기준을 통하여, 명확하게 정해야 한다. 존과 비의 기준 없이는, 나이를 모르고서는, 한국인은 인간 관계를 맺을 수가 없다. 그저 우스울 따름이다.

삶의 바탕

 '궁극적인 전제. 그렇다. 타우베스가 바울-마르치온-벤야민의 계보 아래 스스로를 위치시키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궁구했던 물음은 바로 '궁극적인 전제'에 관한 것이었다. 인간에게 궁극적인 전제란 무엇인가? 그것은 세계 자체, 삶 자체이다. 타우베스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앞서 왜 살아야 하는가라는 물음이 전제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의 관점에서는 이 물음이 언제나 망각 속에 처해 있기 때문에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실제적인 물음 역시 종국에 가서는 어김없이 막중한 혼란과 어정쩡한 타협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저 궁극적인 전제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은 반드시 '계시(Offenbarung)'에 대한 성찰에 다다르게 된다.' (바울의 정치신학/그린비/야콥 타우베스/조효원/p.308-309)

 구원이건, 해탈이건, 노동계급의 승리이건, 애인의 행복이건, 종북척결이건, 그 목적이 무엇인가는 중요하지 않다. 하나의 목적을 향하여 모든 열정을 바칠 수 있는 삶, 그러한 삶을 살 수 있다면, 그 목적의 달성과는 무관하게, 가슴 벅찬 행복을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2014년 5월 17일 토요일

'어쩔 수 없다'

 선생이나 부모와 싸울 줄도 알았고, 일진과는 기싸움도 팽팽하게 펼쳤다. 일종의 학생운동도 해보았고, 실패로 돌아갔지만, 대학 거부도 해보았다. 인생이 지독히도 엿같을 때, 약을 한움큼 먹어보기도 했다. 용기 있었고, 신념 앞에서 꽤나 꼿꼿했다.

 이제는 전혀 그렇지 않다. '어쩔 수 없다'고 말하는 것, 그외에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외할아버지

 1.

 외할머니의 2층 양옥의 현관으로 들어선다. 외할아버지가 품을 활짝 벌리고 있다. 따뜻하고 나그러운 인상이다. 나를 나무라는 엄마에게 약간 쫓기면서, 그의 품으로 달려간다.

 그에 대해 전해들은 정보는 많다. 그는 명망있는 인물이었고, 부유하고 명예로운 삶을 살았고, 대학을 두개 나왔고, 유능한 한의사였고, 아들의 죽음으로 말년을 슬프게 보냈다고 한다. 다혈질이었고, 머리가 뛰어났고, 특이했고, 고집이 강하였다는 점에서는 나와 닮았고, 화통하였다는 점에서는 나와는 달랐다고 한다.

 하지만, 나에게 가치있는 기억으로는, 나와 직접적인 관계를 가진 기억으로는, 가슴을 메여오게 하는 기억으로는, 저것이 유일하다.

 2.

 외로울 때면 경희대 캠퍼스를 걷는다. 다시금 저 기억이 떠오른다. 서글퍼진다.

 부모와 싸우고, 일진과 싸우고, 성적과 싸웠다. 자존심 외에는 나를 지탱해줄 것이 없었다. 나의 유년은 그랬다. 나를 감싸주려는 사람은 없었고, 나를 감싸줄 수 있는 사람도 없었다. 나는 외로웠고, 때문에, 지금도 외롭다.

 내게 외할아버지가 있(었)다면, 아니면 외할아버지 같은 사람이 있(었)다면, 결핍이 채워질 수 있(었)을까? 나의 삶은 바뀔 수 있(었)을까? 거의 기억도 나지 않는 그이지만, 너무도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