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3월 12일 수요일

탈핵운동의 방향에 대한 (잡)생각

 1.다른 이를 고유한 개성을 가진 동등한 인격체로 인정하기 위해서는, 다른 이의 행복을 지켜주기 위해서는, 다른 이와 윤리적인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민중을 위한, 좌익적 운동의 바탕에는 이런 물음이 기본적으로 깔려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단 한명도 놓지지 않으려는, 그러한 시각을 가져야 하는 것 아닐까. 더 나아가서, 사람 이외의 존재에 대해서도 그러한 시각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때문에, 핵마피아에 맞서서 민중의 삶과 행복을 지키려는, 더 나아가 지구의 안녕을 지키려는, 탈핵을 외치는 이들 또한 그래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실망스러운 모습을 간혹 보인다. 후쿠시마가 절대적인 악이라도 되는 양, 사유의 영역 바깥으로 밀쳐내며, 동시에 그 위의 삶에 대한 애정어린 시선마저 거부하거나, 심지어는 그 위에서 어그러져버린 삶을 직접적으로 조롱하고 비하하거나 혐오하는 식으로 말이다(기형 해바라기에 대한 '역겹다'는 식의 반응이 대표적이다.).

 핵폭발 이후 등장한 엉켜버린 생태(체)계와 피폭당한 인간과 인간아닌 존재들, 그들은 우리의 이상과는 동떨어진 영역에서 새롭게 등장하였다, 그들과의 대면은 당연히 당황스러울 것이다. 그러나, 그들 역시 엄연히 우리와 같은 시대에 함께 있다. 때문에, 그들의 안녕을 빌어주고, 그들의 행복을 빌어주고, 그들과의 관계에 대하여 고민하고, 그들에게 애정어린 시선을 포기하지 않아야 한다. 그들만의 이상적인 단일성을 유지하고자, 이상적이지 않은 존재들을, 공동체 바깥으로 치워버리고 지위버렸던, 나치 독일의 악행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는 말이다.

 2.'끝'이라는 말에 신중해져야 한다. '끝'이라는 식의 말은, 그 자극성 때문에 대중의 일시적인 관심을 떠 끌 수 있을 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피폭된 존재들과 함께 그들에 대한 관심마저 '끝'내버릴 수 있다는 점에서, 무책임하고, 핵폭발 후의 상황에 대한 대중의 관심 또한 동시에 '끝'내버려, 그들이 현실적인 불안감을 가지지 못하게 할 수 있다는 점에서, 비효율적이다.

 피폭당한 존재들에 대한 책임을 다하기 위해서는, 대중들에게 막연하기 때문에 (엄청난 것 같기도 하면서 별 것 아닌 것 같지 느껴질 수도 있는) 불안감이 아닌 현실적인 불안감을 주기 위해서는, 피폭으로 인하여 파괴된 그들의 삶을 끊임없이 사유하며 밝혀내고, 피폭된 존재들에게 끊임없는 애정어린 시선을 보내고, 그 파괴된 삶을 어떻게 회복하고 그들과 어떤 관계를 맺어가야 할지 고민하며, 피폭당한(피폭 '후'의) 존재들을 집요하게 사유와 시선의 영역 안으로 끌고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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